2020년 1월 28일 ~ 29일
D+1 : 제주도로 떠나는 길
갑작스러운 한라산 등반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한라산 등반을 포함한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되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나는 가기로 된 것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해외에서 3주 일찍 돌아오면서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케냐에서 킬리만자로 산을 눈 앞에 두고 (돈과 시간 문제로)오르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어, 그걸 대신해 우리나라의 한라산을 다녀오고 싶어서였다.
새로운 습관
케냐 나이로비에서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였다. 해질녘에 이륙한 비행기에서 보이는 저녁 노을을 보았을 때 사진, 기내식이 나왔을 때도 사진, 커피가 나왔을 때도 사진.. 끊임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옆에 앉아계신 케냐인 아주머니께서 “너는 매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사진을 찍는구나! ㅋㅋㅋ"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렇다. 4달간 여행하며 보고 경험한 것들을 최대한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 매 순간 어떤 일을 하던지 간에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 두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무슨 일을 했고, 뭘 먹고,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사진들이다. 지금은 그렇게 남긴 1만여장의 사진에 이야기를 하나 하나 붙여 기록해나가고 있다.
꼭 먼 해외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만 소중할까? 나는 우리나라에서 매일매일 찾아오는 일도 새롭게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지 한 달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이것저것 사진으로 많은 기록을 남기는 것 같다.
백 번도 넘게 왔을 지하철 역에 도착해서도, 기차역에 도착해서도 사진을 남겼다.
아, 근데 이번에 함께 간 친구들이 사진을 거의 안 찍는 친구들이라 같이 별로 안 찍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찾을 수 있는 것
공항에 직접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지만, 조금 편하게 가려고 경주에서 오는 친구와 동대구역에서 만나 같이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얼마 전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많이 유입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외국인과 많은 접촉이 예상되는 공항만큼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D+2 : 한라산 윗새오름으로
한라산의 어리목 탐방로
어리목 코스는 다음 지점을 지나는 경로이다. 아래 사진을 참고하자.
코스의 난이도가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어리목 계곡 - 사제비동산 구간이 빨간색인데, 2km 정도 되는 구간 거의 전부가 계단으로 된 오르막이다.
아쉽게도 어리목 탐방로로 진입한 경우 정상(백록담)은 갈 수 없다. 약 25년 전 쯤 자연 훼손 방지를 이유로 등산로를 폐지했다고 한다. 몇몇 소식통에 의하면 다시 개방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실현될지는 모르겠다.(이미 일시적으로 개방되었다 다시 폐쇄 절차를 밟았을 수도 있고.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다.)
정상에 오르고 싶은 마음은 좀 있었지만, 이미 계획이 어느 정도 다 잡힌 다음에 늦게 참여하게 된 터라 무리하게 계획 변경을 주장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다가 친구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제대로된 산행을 거의 해보지 않은 초심자이기 때문에 무턱대고 “정상 등반"을 고집하기도 어려웠다.
아침 일찍 점심밥 준비하기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오른 후 먹을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 가야한다. 김밥, 주먹밥, 빵, 라면 등 다양한 선택지가 있을텐데 만들기 쉽고 버리는 쓰레기가 남지 않을 주먹밥을 준비해 가기로 했다.
사진을 안 찍었는데, 전날 사온 재료로 두 가지 종류의 주먹밥을 만들었다.
하나는 애호박, 당근, 스팸, 멸치 자반이 들어간 주먹밥, 다른 하나는 참치 마요네즈 주먹밥이다. 두 종류 모두 조물조물 뭉쳐 둔 후 김 자반 위에 굴려서 마무리 했다.
재료를 볶는 것, 주먹밥을 뭉치는 것, 주먹밥을 포장하는 것, 계란을 삶는 것 등 여러 작업으로 나누어 하나씩 맡아서 했는데 나는 주먹밥을 뭉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따끈따끈한 주먹밥이 정말 맛있는게 아니겠는가. 만들면서 꽤 많이 하나 둘 집어먹어버렸다(!) ㅋㅋㅋㅋㅋ
어리목 입구로 향하는 길
등산 준비하기
입구에 도착해 산에 오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에 빌려온 스패츠, 아이젠을 차례로 신고 양손으로 길이를 조절한 등산 스틱을 쥐었다. 산악 동아리 활동을 하는 친구가 말하길, 스틱의 각도는 팔이 90도로 꺾일 수 있도록 맞추는 게 좋다고 했다. 오르막길을 가는 것이라면 그것보다 조금 짧아도 좋고. 만약 그렇게 한다면 평지에서 조금 불편하다고 한다.
어라라. 뭔가 이상하다. 아이젠을 신었는데 왼쪽과 오른쪽에 표시된 로고가 서로 반대 방향을 하고 있다. 좌우 구분 없이 똑같은 제품으로 생산해서 이런 문제가 생기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알고 보니 한 쪽을 반대로 신었다. 아까 바르게 신은 쪽을 보면서 아이젠에 앞뒤 구분이 있다는걸 인지했으면서도 금방 잊어버리고 거꾸로 신었다. ㅋㅋㅋ
처음 해보는 것이라 덜렁거리나보다.
원래는 아이젠의 경우 눈이 많이 덮인 곳에서만 활용하면 충분하지만, 지금은 모든 길에 눈이 쌓여 있고 계속 내리고 있어 처음부터 착용하고 오르는 쪽으로 결정했다.
어리목 입구 ~ 어리목 계곡(쉬움)
탐방로 안내 지도에는 중간 정도의 난이도로 표시되어 있지만 산행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서 나오는 패기(?)가 있어 상대적으로 매우 쉽게 느껴진다. 게다가 좀 더 높은 곳과 다르게 눈이 덜 쌓여 있는 것도 산행에 꽤 큰 도움이 된다. 주변으로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그 옆으로 낮은 높이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눈이 잎의 일부분을 덮고 있어서 마치 무늬가 있는 듯 했다.
걸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어리목 계곡을 마주했다. 여름 때만 물이 흐르는지 골 사이로 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계곡으로는 큼지막한 크기의 돌덩이가 굴러떨어진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안개가 자욱한 모습이 꽤 운치있게 다가왔다.
어리목 계곡 ~ 사제비동산(어려움)
어리목 계곡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자마자 바로 긴 오르막을 오르는 계단이 펼쳐진다. 지금은 시야가 그렇게 잘 확보되지 못해 그렇다 쳐도, 저 멀리까지 끝이 안 보이는 것은 물론 그 몇 배로 많은 계단이 뒤로 펼쳐져 있으니 체력 안배를 잘 해야한다.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날씨지만 그렇게 춥게 느껴지진 않았다. 장갑을 끼지 않아도 손이 시렵지 않았다. 열심히 오르막을 오르는 것 때문에 열이 나서였다. 대신 잠깐 쉬려고 멈추면 이내 체온이 확 내려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빨리 올라가서 쉬는 것 보다 천천히 체력 안배를 잘 하면서 최대한 덜 쉬는 방향으로 산에 오르는 것이 더 좋다.
드디어 도착한 사제비동산
이곳의 나무들은 눈이 그냥 쌓이는 것을 넘어서 얼어 붙어 있었다. 앙상한 가지에 바람 때문에 한 방향으로 고드름같이 자란 얼음덩이들이 붙어있었다.
사제비동산 ~ 만세동산(쉬움)
여기서 아주 조금만 더 걸어가면 샘물이 나온다. 사제비동산에 오르면서 생각보다 많은 물을 마셨는데 여기서 조금 보충할 수 있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물도 많이 차가웠다. 생수 병에 넣어둔 물을 마저 마신 후 물을 한 병 가득 채워넣었다.
그런데, 직전 구간의 끝없는 오르막길 같은 어려운 길이 나타나지 않아서 크게 물을 많이 마실 일은 없었다.
만세동산 ~ 윗세오름(보통)
탐방로 안내 지도에는 이곳이 직전 구간에 비해서 조금 더 어려운 구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직전 구간과 난이도가 같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둘 사이의 난이도 차이는 크지 않다. 완만한 언덕길을 오르고 내리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쯤 왔으면 설산을 오르는 것이라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어 쉽게 쉽게 갈 수 있어 난이도 변화가 거의 와닿지 않았다.
안 보여! 풍경!
탐방로를 지나다 보면 이런저런 안내판을 자주 마주칠 수 있다. 이건 이 지점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오름 풍경을 설명하는 사진이었는데, 표지판만 있지 제대로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쯤 날씨가 풀렸으면 정말 최고였을텐데 아쉬웠다. 그래도 지난 며칠간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입산이 통제되었는데 오늘은 문제 없이 들어와 눈 덮인 한라산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가다 조금 쉬었다. 이러는게 좋지 않지만 그냥 길 주변의 눈더미에 잠시 앉았다.
걸어갈 때는 계속 아래로 떨어져서 잘 안 느껴졌는데, 앉아 있으니 내 위로 쌓이는 굵은 눈 알갱이들이 보인다. 얼굴을 위로 향한 채 눈을 맞고 있으면 따갑다는 느낌이 드는 눈이다.
드디어 도착한 윗세오름
도착한 다음 따뜻한 메밀차와 커피를 마시며 쉬다가 아침에 챙겨 온 주먹밥과 계란을 먹었다.
보온병에 담아 온 마실것은 괜찮았지만 주먹밥과 계란은 추운 날씨 덕분에 식는 것을 넘어 차가워져 있었다. 그래도 3~4시간의 산행 후에 먹는거라 맛있었다.(아… 근데 만들자마자 바로 먹은 따끈한 주먹밥이 더 맛있었…읍읍)
하산
원래 윗세오름을 지나 남벽분기점까지 가보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런데 친구 한 명이 여기에 오르다 쥐도 몇 차례 나기도 했고, 날씨가 좋지 않아 더 간다 해도 많이 달라질 것은 없다고 생각해 윗세오름을 끝으로 하산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산을 열심히 오르느라 뒤를 제대로 돌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내려갈 때의 풍경은 새롭다. 산행 뿐만 아니라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것을 넘어 천천히, 더 멀리 서서 바라보며 시각을 넓히는 것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다가오는 느낌이다. 어떤 것에 몰두하면 그 생각 이상에 눈길을 주기가 참 어렵다.
원래는 한 번 왔던 길이라면 훨씬 더 빠르고 쉽게 갈 수 있는데 꽤 많이 걸어왔는지 지나왔던 길이라고 해서 더 짧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특히 끊임없이 이어지던 오르막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리막이 되어 신경을 많이 쓰게 했다. 등산 스틱의 힘을 좀 많이 빌려서 조심조심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