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2019년 8월 26일
프롤로그
가을, 겨울 긴 여행을 시작하다.
D+1 한국을 떠나는 날
2019년 8월 26일
오늘부터 몇 달간 한국을 떠나 굉장히 먼 곳까지 특별한 방법으로, 길게 여행을 다녀오게 된다. (이전 포스트 참고) 막상 떠나려고 하니 (모두 동의할 지는 모르겠지만) “이 살기 좋은 나라”를 떠나서 살 생각을 하니 괜히 서운했다. 그 서운함이 특히 더 강했던 건, 쉽지 않은 여정인 데다 안전하게 잘 돌아올 수 있을지 스스로 확신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때가 오긴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으로는 여행의 끝을 상상하기가 아주 어렵기 때문이었다.
저녁 비행기를 타기 위해 점심때 쯤 인천공항으로 출발해 5시쯤 도착했다. 저녁을 간단히 먹은 뒤에 출국장에 들어왔다. 자동 출국 심사를 마쳤을 때 “안녕히 가세요”라고 나오는 음성 안내를 들으니 정말 한국을 몇 달 동안 못 보겠구나 싶었다.
윤택한 삶을 기대하지 말자! 욕심을 비운 가방
눈앞에 펼쳐지던 면세 구역은 가볍게 지나쳐 왔다. 이번 여행에서는 나를 꾸미는 데 신경 쓰거나 윤택한 삶을 얻으려고 하면 안 되었다. 내가 지고 가야 할 짐만 늘어나고, 이것저것 불평하게 되고, 도난 등의 각종 범죄에 노출될 일만 늘어날 수도 있다. 허허.
가방을 챙길 때부터 고민을 좀 해봤다. 필요하다 싶은 것들을 다 가져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챙기면 챙길수록 독이 되기에 생존에 직결되는 물품이 아니면 최대한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날씨를 다 겪게 될 것 같지만, 날씨에 따라 겹쳐 입을 수 있도록 옷을 최소한으로 준비했고(덕분에 거의 똑같은 옷만 입고 지냈다 ㅋㅋㅋㅋ), 대체할 방법이 없는 물품이 없는게 아니라면 두고 왔다. 예를 들면 사진 백업과 여행 기록을 위해 노트북이 있으면 좋은데, 각각 아이패드와 필기로 대체가 가능해 챙겨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이 많았는지 배낭은 꽉꽉 찼고, 무게는 20kg이나 되었다.
내 몸통의 1/2 이상, 내 몸무게의 1/3에 해당하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편리함을 하나하나 포기하는게 아쉽기도 했지만, 꼭 가져가지 않아도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이야기 했던 대로 컴퓨터가 없어도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할 연필과 노트가 있었다. 물론 컴퓨터로 조금 더 빠르고 편하게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노트에다가 기록을 안 한다면 노트북이 있어도 매한가지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의지가 충분하다면 노트북이 없어도 충분히 노트에 기록을 남길 수 있을 거다.
반대로 의지 결여는, 노트북을 인터넷 머신으로 전락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탑승동에서 출발을 기다리며
바로 탑승동으로 건너와 게이트 앞에서 휴식을 취했다. 출발 예정 비행기를 표시해주는 전광판에 블라디보스토크행 비행기편도 올라왔다.
출발 며칠 전부터 귀가 살짝 아프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고속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아파트로 이사했는데, 이걸 타고 내린 직후에 귀가 아프던 증상이 엘리베이터와 상관 없이 가끔 귀가 멍해지는 만성 증세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왜 그런지는 전혀 알 수 없어 그냥 넘어갔지만, 점점 “어쩌면 잘못하다 귀가 먹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빈도와 강도가 강해졌다.
(내 생각엔, 엘레베이터 덕분에 원래 있던 만성 비염이 악화된 것 같았다)
아무튼, 컨디션이 꽤 불량 했기 때문에, 지난 홍콩 갈 때 피곤해서 마셨던 “오렌지 C 부스터”라는 과일 주스를 사 마셨다. 지난번에 피로회복 효과가 꽤 있었던 기억에 끌려 마셨는데, 이번에도 역시 효과가 있는 듯 했다.
비행기는 128번 게이트에서 출발했다. 조금 기다리니 타야할 비행기가 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 이륙했다. 이미 출국은 했고, 이제는 영종도 땅에서도 완전히 떨어져 올랐다.
평면지도의 함정
이륙할 때 창밖을 둘러보니 서쪽 방향으로 이륙했더라. 그래서 곧 동해 쪽으로 방향을 돌릴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비행기의 머리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서쪽으로 계속 향하는 것이다.
비행기는 당연히 동해 바다를 가로질러 갈 줄 알았다. 블라디보스토크가 동해의 끝자락에 있으니까. 그 사이에 비행기는 더 올랐고, 주변이 전혀 보이지 않아 방향을 잃었다. 비행기가 어떻게 가는지 궁금해서 GPS를 켜고 위치를 측정해 보았다.
흔들림이 전혀 없다 싶더니, 계속 서쪽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럼 중국 영공을 거쳐서 가나…?’ 하는 생각이 살짝 스친 후에야 내가 “평면지도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주로 보는, 경위선이 나란하게 그어진 지도에서는 고위도로 갈수록 경선 사이의 거리가 실제에 비해 과장되어 그려진다. 즉, 위도가 높은 중국 영공을 가로지르는 것이 남한 영공을 지르는 것보다 경로가 더 짧은 것이다. 타국 영공 안거치고 동해로 가는게 속 편하겠다고 성급히 판단한 나 자신을 보고 반성했다 ㅎㅎ
첫 방문지에 도착하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예상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 2시간 조금 넘는 시간을 날아 무사히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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