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7 일차, 2019년 9월 9일 ~ 10일
오늘의 주요 이동 경로
오늘은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을 떠나 카자흐스탄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는 날이다.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오가는 열차를 보면서 신기해 했는데, 이제는 내가 국경을 넘는 열차를 타게 된다. 섬 아닌 섬나라에 있다 보니 별게 다 신기하다.
추천 배경음악 -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이건 선택사항인데, 여건이 되고 마음이 내킨다면 아래 음악을 틀어 두고 글을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러시아 작곡가 보로딘의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이다. 벌써 제목부터 참 잘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글쓴이는 이 곡을 중학생 때 처음 접했는데, 그 때는 곡이 전하는 분위기와 상황이 어떤지 도저히 감을 잡지 못하겠던데, 지금은 어느정도 느낌이 온다.
중앙아시아의 초원이 주는 감상과 보로딘이 표현한 음악세계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D+16 : 시베리아를 떠나 중앙아시아로 향하다
오늘도 오로지 기차를 탈 준비를 하는데만 집중!
열차는 저녁 6시 반에 출발한다. 그런데 묵고 있던 호스텔에는 정해진 체크아웃 시간이 있다. 12시. 시간은 지켜야하기에, 총 6시간을 무거운 짐과 함께 바깥에서 보내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방에서 짐은 빼고 거실에서 시간을 좀 보낼 수 있냐고 물어봤으면 싶다. 유럽의 호스텔에서는 체크인, 아웃 시간을 벗어나더라도 허락 받고 공용공간에서 시간을 잘 보냈거든!
공원에서 대기
처음에는 공원으로 나가 보았다. 이틀 전, 공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기 때문에 적당히 쉬다 가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예상과 비슷하게 평일의 공원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날씨는 흐려 차가운 바람이 많이 불었다. 계속 벤치에 앉아 바람을 맞기가 그래서 장소를 옮겼다. 조금이라도 기차역과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아 근데, 식수 5L와 이틀 먹을거리를 다 들고 걸어가니 꽤나 힘들다. ㅋㅋㅋㅋ 다음번에는 기차역 주변 마트가 있다면 그곳을 활용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카자흐스탄 텡게(KZT) 환전 시도
카자흐스탄으로 가는데, 그 전에 환전을 조금 해갈까 싶었다. 그래서 근처에 보이는 은행 영업점 한 곳을 방문했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보는데 카자흐스탄 텡게로 환전할 수 있냐고 대충 물어보니까 안 된단다. 러시아랑 국경도 맞대고 있고, 노보시비르스크는 또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데도 카자흐 텡게는 없다는 모양이다. 찾으려면 조금 더 큰 지점에 가야하나 싶기도 했다.
달러, 유로, 엔화, 위안화에 밀려 카자흐 텡게는 기타 통화 취급을 받고 있었다. ㅋㅋㅋ 자산 가치도 확실하지 않고, 텡게를 찾는 사람도 많지 않은 모양이다.
또FC 치킨버거 섭취
그렇게 환전에 실패하고 나니 딱히 시내에서 더 할 일은 없겠다 싶어서 점심을 먹으러 기차역 앞의 KFC로 향했다. 앞으로 기차 안에서 이틀 밤을 묵어야 하는데, 부족할 영양을 미리 보충(?)하자는 생각에서 햄버거를 먹기로 했다. 3일 연속 KFC를 가다니…. ㅋㅋㅋㅋㅋㅋ
아무튼, 매장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이번에도 손님들은 다 먹은 후 남은 쓰레기를 정리하지 않고 자리를 비웠는데, 그 후로 재미난 일이 벌어졌다.
비둘기와 참새들이 그 테이블로 총총 모여들어서 남은 치킨 부스러기들을 쪼아 먹고 있었다. ㅋㅋㅋㅋㅋ 어느정도 학습은 되어 있는지, 주인이 없는 음식만을 노렸다. 자리를 정리하는 직원분은 치우는 것 뿐만 아니라 새들을 쫓아내는 업무까지 맡으셔야 했다.ㅋㅋㅋ
다시 도착한 노보시비르스크 기차역
그렇게 다시, 노보시비르스크 기차역에 도착했다. 아까는 찬바람이 불더니, 이제는 따스한 햇살이 들어 더웠다.
사진의 왼쪽에 보이는 노점상에서 잡화를 팔고 있었는데 혹시 실내용 슬리퍼가 있나 싶어서 찾아보니 있어서 구매했다. 이제 기차에서 슬리퍼를 신고 더 편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ㅎㅎㅎ
세 시간 더 이어진 기다림
여러 곳을 들렀다 빙빙 둘러 왔음에도 시간을 절반 밖에 보내지 못했다. 이제는 역에서 시간을 보내야한다. 대합실 의자에 앉아 조금 쉬면서 페이스북에다 바이칼 호수를 둘러본 이야기를 조금 정리해서 올렸다.
항상 제때 제때 안 올리고 조금씩 늦게 올렸는데, 나의 게으름이 제일 큰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조금 더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성급한 판단에 의한 오류를 줄이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러시아”라는 나라의 특별함인데, 그걸 처음 방문한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의 특별함이라고 판단해버리는 등의 오류를 발생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전광판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이번에 타야 할 301 열차를 발견했다. 일단 기차가 정상적으로 올 것이라는 사실이 보장되었다.
그러다 심심해서 옆 대합실로 가 보았다. 이렇게 큰 대합실이 한 두개가 아닌, 여러 개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처럼 상업시설이 결합되어 거대하다는 느낌보다는 궁전의 웅장함이 느껴진다. 음식점이 있기보다 역내 호텔과 같은 시설이 있다.
마지막 사진은 화장실에 갔다 찍은 사진이다. 화장실 뷰가 왜 이렇게 좋나 싶을 정도로 좋아서 신기했다. ㅋㅋㅋㅋ
카자흐스탄으로 가는 민트색 기차에 몸을 싣다
대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출발하는 기차들은 하루에도 정말 많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 우리가 탈 기차를 전광판의 네 번째 위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플랫폼 번호가 표시되어 그쪽으로 향했다.
좀 전까지는 맑던 날씨였는데, 갑자기 아주 굵은 빗방울이 하늘에서 후두둑 떨어진다. 승무원 분들도 급히 우산을 피셨다. 플랫폼에 나오자 마자 서둘러 객차에 탑승했다. 어라? 근데 타야할 칸 앞에 승무원이 안 나와 계신다. 어찌 된 일인지…? 계속 무거운 짐을 들고 비를 맞을 수는 없어서 일단 타 보았다. 그런데 승무원은 안계시는데 탄 사람은 많다. 그냥 들어와도 되나 싶긴 했는데, 어찌 잘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냥 그대로 있었다. 아무튼 타긴 했으니 카자흐스탄 까지 가는거다. 크게 잘못되는 일이 없으면 쫓겨날 일이 없지 않은가!
편히 짐을 내려두고 기차만 둘러봤다. 비록 카자흐스탄 철도청에서 운영하는 객차였지만, 지난 세기 한 지붕 아래 있었던 나라들이라 그런지 거의 다를게 없었다. 그냥, 이 객차가 소련 시대의 것 같아 보이는 오래된 객차였다. 객차 시설 전반이 열악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첫 번째 탔던 기차가 그리 좋은 기차도 아니었던지라 크게 불편할 것이 없었다(!).
승객들의 대부분은 카자흐인이었다. 객차의 특별한 존재인 외국인을 위해 이것저것 알려주고 챙겨주셨다. 지금까지 만난 구 소련권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했다.
신원 확인도 제대로 안 된 채로 기차가 출발했고, 그 후에 승무원께서 오셨다. 그런데 정작 신원 확인은 안 하고 린넨부터 먼저 나눠주시겠는게 아니겠는가. 일을 대충대충 처리하시나보다 싶었다.
그러고 나서 한 시간 후쯤 승객 명단을 적은 출력물을 가지고 와서 신분증을 체크한 다음 승객의 서명을 받아가셨다. ㅋㅋㅋ
오비 해(Sea of Ob)?
여기는 오비 해(Sea of Ob)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근데 오비 강 아니었냐고? 그리고 여기는 깊고 깊은 내륙 지역인데 바다가 어디있냐고? 맞다. 실제 바다가 아닌, 오비강에 건설된 댐이 만들어낸 거대한 호수가 바다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냥 눈으로 봤을 때는 바이칼 만큼 광활해 보인다.
여름이 되면 사람들이 마치 바다인 것 처럼 이곳으로 나와 물놀이를 한다고 한다. 바다가 없는 독일 베를린에서도 바다 대신 반제 호수를 찾는다던데. 비슷해 보였다. 그나저나 강물은 깨끗할까?
1/2 나잇, 0/2 데이
기차에서의 첫 번째 밤이 찾아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첫 기차에서 만났던 타쿤 아저씨가 해준 말대로 투 데이, 투 나잇의 지혜를 따랐다. 원 나잇을 카운트 하면 되는거다.
이제 기차에서의 생활도 자연스럽다. 해가 지면 곧 객실이 소등되는 것이고, 잠을 청하면 된다.
자기 전에 양치를 하고 오려고 했는데, 아뿔싸! 기차가 역에 정차해버렸다. 오물이 선로로 떨어지는 옛 객차라 역 주변에서는 화장실이 폐쇄된다. 그래서 조금 기다렸다, 다시 열리면 가야했다. 그런데, 깜빡 잊고 스르르 잠들어버렸다. 이런 ㅠㅠ
그러다 12시 쯤 비어 있던 맞은편 자리에 새로운 승객이 탑승하는 소리에 잠시 깼는데, 이 때도 화장실이 잠겨 있는건 마찬가지였다. ㅠㅠ 여기서도 어둠 속에서 가만히 기다리다 실수로 잠들어버려서 3~4시 쯤 목말라서 일어났을 때 겨우겨우 양치를 마치고 나서 다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아니, 그런데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객차 섀시가 나무로 되어 있어 창문에 빈틈이 있는데 그 빈틈으로 초원의 차가운 밤바람이 그대로 새어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치 머리가 냉각되는 느낌이었다! ㅠ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바람막이를 꺼내 두건처럼 머리를 덮고 다시 잠을 청했다. 하아… 참 웃기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D+17 : 마침내, 카자흐스탄으로
처음 넘어보는 육로 국경
5시 40분, 해가 떠오르고 있는 아침이었다. 승무원 아저씨께서 객차 안을 한 두번 돌면서 발목을 툭툭 건드려 승객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아, 이제 국경에 도착했구나 싶었다. 가방의 안전한 곳에 넣어 두었던 여권을 빼냈다.
그리고 이 때 맞은편 자리에 타신 할머니와 처음 만났다. 어제 밤의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러시아에 사는 가족들을 만나고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시는 길인 것 같더라.
러시아측 출국 심사
(안타깝게도, 출입국 과정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는 경우가 많기에, 찍지 않았다. 글만 잔뜩 있을 것이다.)
달리던 기차가 속도를 늦추고, 어느 역에 멈추었다. 휴대폰 GPS로 위치를 확인해 보니 러시아 국경을 넘어서기 직전의 역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다. 출입국 관리하는 공무원의 숫자가 많지 않아서 모든 칸을 다 도는데 오래 걸리는 것 같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니 우리 칸에서도 출국 절차가 시작되었다.
먼저 경찰과 함께 개가 찾아왔다. 마약이나 폭발물을 탐지하기 위한 모양이다. 승객의 짐 중 몇몇은 직접 열어보라 해서 꼼꼼히 확인하기도 한다. 한 번 그렇게 쑥 훑고 나가면 출입국 관리 공무원 두 분과 러시아 경찰관이 함께 들어와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출국 심사를 진행한다.
입국 시 받았던 거류증과, 정식 등록 숙박업소로 부터 받은 체류 확인 문서 등을 준비해 드렸다. 근데 체류 확인 문서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 그냥 가방에 넣어가기만 했다. 그러고 나서 경찰관님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Do you speak Russian? or English?
Why do you visit Russian Federation
How many days you stayed in Russian Federation
등등의 질문이 이어졌다. Russian Federation이 킬링포인트다. 정식 국호라서 전혀 이상할게 없는데 칼 같이 각을 잡은 채로 군인이 대답하는 듯한 말투로 Russian Federation을 연발하시니 거기서 느껴지는 부자연스러움이 조금 웃기긴 했다.ㅋㅋㅋㅋㅋㅋ
이후로도 카자흐스탄 방문한 다음에 어딜 갈거냐, 한국으로 돌아가냐? 러시아로 돌아온다면 얼마나 있을 것이냐, 러시아 다음으로는 어디로 갈 것이냐 등의 질문을 계속 한다.
러시아에서 나간다는 사람인데도 그냥 보내주지 않고 생각보다 많은 내용을 물어봤다. 궁금하면 계속 물어보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카자흐스탄 갔다가 바로 집간다고 했으면 끝났을지도 모르는 질문이, 러시아로 다시 돌아온다고 답변하는 바람에 더 길어지긴 했다.
러시아 경찰 아저씨가 떠난 이후에도 몇 주 동안 “Russian Federation”의 음성이 귓가를 맴돌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ㅋㅋㅋ 덕분에 2시간 정도 기다려야 해서 무료했던 출국 심사 과정이 한결 즐거워졌다!
카자흐스탄측 입국 심사
러시아측에서 모든 체크를 끝내면 열차를 보내 준다. 그러면 조금 달려 국경을 넘은 다음에 다시 첫 번째로 나타나는 역에서 멈춘다. 이런 역들은 대부분 여객을 취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역이기 보다는 완전히 출입국 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역에 더 가까운 경우가 많다. 아무튼, 얼마 가지 않은 채 다시 멈추었다.
조금 기다리니 승무원 아저씨께서 다시 카자흐스탄 입국에 필요한 카드를 주셨다. 뭔가 러시아에서 받은 거류증 같이 생긴 쪽지다. 대충 스스로 적을 수 있는 것만 다 적고 나머지를 비워두니 승무원 아저씨께서 나머지 부분 작성을 도와주셨다.
이걸 작성하고 있던 중에 군견이 객차 안으로 들어왔다. 냄새 맡으라고 한 군견인데 샅샅이 뒤지며 킁킁거릴 생각은 않고 신이 나서 복도를 와다다다 뛰어가며 객차를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다시 한 번 돌아와 즐겁게 달려서 다시 통과해 나갔다. ㅋㅋㅋㅋㅋ 보는 내가 더 즐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돌아다니는데 위험 물질 탐지가 제대로 되나…? ㅋㅋㅋㅋ
카자흐스탄에서는 군인이 들어와 입국 심사를 진행한다. 평범하게 입국 심사에서 물어볼만한 질문들을 한 뒤에 여권 스캔을 하고 얼굴 사진을 찍은 뒤 도장을 쾅쾅 찍어 마무리했다.
분명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출입국 심사였는데, 이걸 하느라 오전 시간이 거의 다 지나갔다.
아뿔싸! 카자흐스탄에 들어와 러시아 인터넷이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원래도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놀라지도 않았고, 한국에도 며칠동안 연락이 안 될 수 있는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이야기를 해뒀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이라도 편하게 쓰는 걸 못 쓰니 좀 아쉬웠다.
끝없는 중앙아시아의 초원
처음에는 시베리아가 정말 황량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시베리아를 모두 가로질러 오니, 어떻게 보면 황량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속에서도 많은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오면 초원만 나올 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상하던 풍경은 맞았지만, 그 스케일은 내가 예상하던 것을 훨씬 많이 뛰어넘었다. 매우 광대하고, 황량함도 상상 이상이었다.
전봇대와 전선을 제외하면 인간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별다른 산도 없이 지평선만 보이는 초원만 펼쳐졌다.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바르나울에서부터 함께 한 맞은편의 할머니께서 꿀을 먹어보라고 한 숟가락 덜어 주신다. 먹을거리가 부족한 기차에서 먹는 꿀이라 그런지 정말 달고 맛있었다.
객차 내부의 모습이다. 러시아 기차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낡은 부분이 빠르게 고쳐지지 않았다. 아, 사진 속의 아저씨와의 해프닝이 몇 개 있었는데 크게 좋지많은 않았다(?).
아저씨가 물을 대충 마시고 싶다는 사인을 보내셨고, 그러라고 하니 병 입구에 입을 대고 쪽쪽쪽(!!)하고 물을 드셨다. ㅋㅋㅋㅋ 그냥 마셔도 딱히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고 뭐… 그럴 일은 많이 없겠지만 그냥 느낌이 그래서 남아 있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ㅋㅋㅋ
그리고 조금 뒤에 다시 오셔서 자기 시계를 가리키고 내 시계를 가리키면서 뭐라뭐라 말씀하셨는데, 갑자기 아저씨 시계를 풀어두는게 아니겠는가! 대충 상황을 보아하니 “자신의 시계가 베트남제인데 우리 둘이 시계를 바꿔 볼래?”하고 말씀하시는 듯 했다. 어어… 나도 중국제 샤X미 스마트밴드를 쓰고 있던지라 그리 좋은 것도 아닌데 뭔가 내가 손해보는 교환인 것 같아서 거절했다. ㅎㅎ 사실 바꾼다 해도 사용 방법을 알려드리긴 참 어려울 것 같다.
정말…. 아침에 눈을 뜬 이후부터 해가 질 때까지 보이는 풍경이 하나같이 다 이렇다. 지평선이 보이는 초원, 지평선이 보이는 초원, 지평선이 보이는 초원.
적어도 시베리아에서는 규모가 꽤 되는 산과 언덕, 다양한 종류의 나무와 수풀, 개울, 늪지, 절벽 등이 번갈아가며 나타나서 이것저것 볼게 많았는데 여기서는 오로지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의 지평선 뿐이었다.
하루 종일 곡선 없이 아주 곧게 뻗은 철로를 빠르게 달리는데도 이 초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옛 유목민족들이 이런 드넓은 초원을 오가며 생활을 이어나갔겠구나 싶었다.
한참 풍경을 바라보다, 피곤해서 자다가 다시 일어나서 초원을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객차 내의 전기 콘센트도 제대로 작동하질 않아서 배터리를 아끼느라 전자기기를 이용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조금은 제한적이었다.
요즘 몽골 여행이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다던데 시베리아지역(특히 올혼섬)과 중앙아시아 초원을 원없이 본 것만으로 몽골 여행에서 느껴볼 법한 대자연을 대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ㅋㅋㅋㅋ
카자흐스탄 기차에서도 승무원실에서 이렇게 찻잔을 빌려서 사용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은색 컵받침은 카자흐스탄 철도청 로고를 드러내는 디자인으로 되어 있다.
누르술탄 형과 함께하는 한글교실
해질녘이 되어 맞은편에 타고 있던 누르술탄 형에게 한글을 알려줘 봤다.
기본 자음 14자, 기본 모음 10자가 대충 어떻게 되는지 알려준 다음에 형의 이름(누르술탄)이나 고향 지명(쉼켄트)을 한글로 어떻게 표기하는지 보여주고 각각의 글자가 어떻게 소리가 나는지 알려주었다.
아마, 상당히 혼란스러웠을 거다. 로마자와 키릴문자 사이에 공통 글자도 많고 (문자 자체에 소리가 있는건 아니지만) 소리도 대략 비슷한 반면, 한글은 전 세계 어딜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문자인데다 그 특이한 문자를 조합해서 완전한 한 글자를 만들어낸다는 개념 자체를 처음 접하는 것일 거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누르술탄 형에게 한글로 이름을 다시 써보게 했는데 “ㄴㅜㄹㅡㅅㅜㄹㅌㅏㄴ”이라고 썼다.
중간 중간 어디 써야하는지 위치를 바로잡아 주니 정말 혼란스러워한다! ㅋㅋㅋㅋㅋ
이렇게 우리 테이블에서 한글을 가르쳐주고 있으니 바로 옆 테이블에서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고 계신 카자흐스탄 승객들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우리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오늘 낮부터 한글 전파를 시도했더라면 더 많은 소통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저물어간다. 처음에 기차를 만 3일이 넘도록 탄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 이틀, 사흘이 되는 장거리 기차 이동이 그렇게 어색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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