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차, 2019년 8월 27일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

여행 기간 : 2019년 8월 27일 ~ 2019년 9월 10일
여행 지역 : 블라디보스토크, 이르쿠츠크, 올혼 섬, 노보시비르스크, 아카뎀고로도크


D+2 : 다른 세계에서 맞는 첫 하루

2019년 8월 27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발을 딛다

잠 들 틈도 없이 잠깐 사이에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착륙했다. 비교적 가까운 지역이라서 그런지 공기의 덥고 습한 정도가 가져다 주는 분위기가 그렇게 새롭지는 않았다.

우리나라는 14년도부터 러시아에 비자 없이 갈 수 있게 되었다. 아마 14년도에 있었던 소치 동계 올림픽 기간에 맞춰 관광을 활성화하려고 몇몇 나라들의 입국 규정에 손을 조금 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러시아 여행 준비 과정이 쉬워진 이후로, 가장 가까운 이곳 블라디보스토크가 동북아 국가에서 인기 있는 관광지로 변신한 것 같았다. 다만, 소련시절부터 내려져오는 “거류증”이라는 문서를 내주고, 출국할 때 까지 소지해야한다. 이 거류증을 가지고 매일매일 본인의 거주지 정보를 신고해야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지금은 정말 흐지부지해져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번 여행에서 러시아 국경을 세 번 넘나들었는데도 거주지 등록 문서를 확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거류증 자체는 중요하니 잃어버리지 않도록 신경 쓰자!

한국에서 이것저것 한다고 키릴 문자 읽는 법을 제대로 다 익히지 못한 채로 러시아에 도착했다. 입국심사장에 영어로 병기되어 있는 모든 키릴 문자를 읽어보며 러시아식 키릴 발음을 유추해 나갔다. 역시, 급하면 효율이 높아진다 ㅎㅎ
그런데, 이상하게도 입국 심사대 번호에 홀수만 있다. 왜 그런 걸까?

새벽에도 활발했던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은 우리나라 지방의 중소규모 공항 정도의 분위기를 풍겼다. 대구 공항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까지 영업하던 작은 상점들, 체크인을 하려는 사람들, 호객하는 택시 드라이버들로 나름 시끌벅적했다.

airport 밤에도 생각보다 활발했던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통신사 팝업스토어 직원도 우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베리아 커버리지가 좋다던 Beeline심카드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러시아는 여러 공화국, 자치주 등이 모인 연방제 공화국이고, 통신사와 같은 일부 회사는 공화국별로 다른 정책으로 영업하는 등의 특징을 보이기도 하나보다. 그래서 가끔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심카드를 구입했는데, 타 지역에 가면 먹통이 되는 등의 해프닝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직원분께 러시아 내에서 방문할 지역을 몇 곳 언급하며 러시아 전역에서 인터넷을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물어보니, 450루블(약 9000원)에 한 달 무제한 인터넷을 주는 게 있단다. 한국 통신요금을 생각하면 터무니 없이 저렴한 요금이어서 그대로 바로 달라고 그랬다. 여권을 보여주고 등록하면 된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비록 공항은 24시간 운영되고 늦은 밤에도 사람이 오가긴 하지만, 지금은 택시를 제외하면 50km 정도 떨어진 시내에 나갈 방법이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역까지 이어주는 공항철도는 오전 7시쯤 있다고 한다. 남은 시간 동안 좀 자 두자!

공항철도 입구, 노숙이 가능한 의자

청주 공항과는 다르게 의자에 팔걸이가 없어서 편히 누워 잘 수 있었다. 러시아라서 모기가 없을 줄 알았는데, 여름이라 그런지 여기서 몇 마리가 날아다니는게 보인다.
자는 도중에 쿵! 하는 소리가 들려 일어나 보니,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폰이 밖으로 흘러나와 떨어졌다. 이렇게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세계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

낯선 공항, 잠 자리 아닌 곳에서 청하는 잠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한 번 잠들면 거의 한 시간 정도는 잤지만, 자다 깨다 했다. 그러다 보니 슬슬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하더라. 간밤에 비도 조금 온 것 같고.
morning 공항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

피곤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자둔 것 같지는 않지만, 첫 차 시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다시 잠들기는 애매했다. 그래서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먹을 것을 좀 먹고 움직여 보기로 했다. 여기에서도 삼각김밥을 구할 수 있었는데, 러시아어로 적혀 있는 맛을 도저히 추측할 수 없었다. 번역기에 쳐봐도 알 수 없는 맛도 있었다. 하나 사서 먹어 봤는데, 생선 조림 맛이 나는 듯 했다. 한국의 삼각김밥과는 꽤 다른, 익숙하지 않은 맛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에 갑자기 공항철도 역의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가는데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해 밀렸다. ㅎㅎ

공항철도 오픈과 함께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 첫 차를 탈 수 있을까?

간밤에 공항에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공항철도 터미널이 붐비기 시작했다. 첫 차 출발 시각이 42분인데, 10분만에 발권을 마치고 시내로 향할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 첫 차 탑승에 실패하면 또 한 시간을 기다려야한다! 이런!
다행히도, 직원분들도 이런 상황은 잘 알고 계시는지 열차 출발 시각이 임박할수록 발권 및 검표를 더욱 신속히 처리해주셔서 시간 내에 탑승할 수 있었다. 가격은 1인당 250루블 정도다. 인천공항 공항철도 일반열차 가격이랑 비슷하다.

공항철도 객차 내부, 바깥 풍경

한국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어디를 봐도 주변을 둘러봤을 때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곳을 발견하기 무척 어렵지만(하다 못해 휑한 들판이 보인다 해도 논밭이다 ㅋㅋㅋㅋ) 다른 나라에서는 발견하기 훨씬 더 쉬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송전탑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복잡한 풀밭 사이로 나지막한 키의 나무가 조금 자라는 모습이 끝없이 펼쳐졌다. 도심에서 50km 떨어져 있는 곳에서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니. 우리나라에서는 인구가 아무리 적은 곳이라 해도 이런 모습은 보기 힘든데. 땅이 참 넓고, 남아 도는구나 싶은 생각이 확 와닿았다.

계속해서 창밖을 볼까 싶었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다음 일정에 무리가 갈 것 같아 가끔 가다 한 번씩 눈 떠서 바깥을 보고, 다시 눈 붙이고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중간 정거장에서 사람들이 조금씩 타고 내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말썽 투성이, 블라디보스토크

원래도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그런데, 빗방울이 조금씩 흩날리다 말다 반복하더니 도심에 가까워지면서 장대비로 변했다. 혹시 쓸 일이 있을지 몰라 우산을 챙겨왔는데, 도착 몇 시간 만에 바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우산을 챙기고, 아직까지 짐 싸는 솜씨가 모자라 잔뜩 부풀어 있는 배낭에 커버를 씌우고 역사 바깥으로 나왔다. 비가 많이 오는 상황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도로에 가득 고이기 시작한 빗물이었다.

분명 우산을 쓰고 있는데 차가 지나가면서 튀기는 물에 맞고, 방수가 되는 트레킹화를 신고 갔음에도 발목을 넘어 흘러 들어와 무용지물이었다. 게다가 미리 알아봐 둔 숙소로 가는 길이 반복되는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가득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빗속에서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상황이 도전적인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헉! 근데 저게 무엇인가!

숙소 가는 길, 언덕 아래에 생긴 물난리

세 면이 경사져 있던 낮은 지대에서 물이 빠지지 못해 그대로 고여버린 것이다. 여행 첫 날부터 재난 아닌 재난이 펼쳐졌다. ㅋㅋㅋㅋ 그보다 도로에 제대로 된 하수구 하나 없는 이 도시의 인프라 실태가 그렇게 엽기적일 수 없었다. 당연히 있을 시설이라고 여겼지만, 러시아는 이렇게 모든 도시의 인프라 하나 하나를 관리할 여유는 없는가 보다 싶었다.

문제는 물난리가 끝이 아니었다. 분명 숙소 앞에 잘 온 것 같은데 찾아 뒀던 숙소가 보이지 않는 거다. 휴대폰 지도 위치 표시가 잘못될 수도 있고, 입구를 못 찾는 것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 주변 이곳 저곳을 다 돌아다녔다. 숙소 같아 보이는 곳을 들어가 보려고 해도, 잘못된 건물에 마음대로 들어갔다 문제가 생길까 그러지도 못했다. 그렇게 30분을 헤맸다. 그러다가 똑같은 숙소를 찾고 있는 외국인 배낭여행객을 만났다.
그러던 중 지나가던 동네 주민을 발견하고, 어찌어찌 물어보니, 아무 것도 없는 듯 한 건물 3층이 그곳이란다. 올라가 보니 그랬다. 지금은 체크인 시간이 아니라서 방에 들어갈 수는 없고 짐을 맡겨두고 난 다음 근처 식당으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소나기 속에서 언덕을 오르내리고, 물에 잠긴 거리를 건너고, 숙소 위치를 몰라 몇 십 분간 헤매고. 처음부터 쉽지 않은 일들이 연달아 찾아왔다.

푹 쉬면서 천천히 남은 하루를 보내기

하루가 시작된 지 정말 오래 된 것 같은데 아침이라고?

러시아 가정식을 판다는 가게에서 먹은 아침. 한국어 메뉴도 있어 신기했다.

팬케이크와 감자퓨레가 곁들여진 돼지고기 고로케 같은 음식을 주문했다.
아! 이건 러시아 음식이구나! 하는 정도의 특별함은 없었고, 충분히 예상 가는 맛이다.
팬케이크 옆에 있던 크림은 사워크림이었던 듯.

숙소에서 낮잠을

첫 번째 날 묵었던 숙소

아침을 먹고나니 이제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방 상태가 그렇게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사진으로 볼 때는 정상적으로(아, 아닐수도 있겠구나) 보이겠지만 환기가 잘 안 되어서 그런지 퀴퀴한 냄새가 많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잘 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굉장히 큰 혜택을 누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뭘 생각하고 왔길래 이런 것에도 감사하고 만족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황당한 일을 생각해보고 나서 오면 모든 세상이 평화롭게 보인다 ㅋㅋㅋㅋㅋ 또,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줄이면 내 불만을 고마움으로 바꿔나갈 수 있다.
혹자는 이걸 보고 “정신 승리”라고 하며 불쌍하게 볼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생각하는 방식이 만드는 행복도 큰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아무튼, 공항에서 어설프게 밤을 보내느라 쌓인 피로감에 잠들었다.
한 숨 자고 일어나니, 계속해서 내리던 비가 완전히 잦아들고 침수되었던 곳의 물은 다 빠져 있었다. 저녁 먹고 주변도 돌아볼 겸 밖으로 나와 보았다.

저녁 먹고 주변 둘러본 후 하루를 마무리하기

주변에 있던 피자집

구글 아저씨가 주변에 적당한 가격대의 괜찮은 피자집이 있다고 그래서 그 곳으로 가 보았다. 맛과 가격 모두 우리나라의 2류 피자 체인점과 흡사했다.
피자를 먹던 중에 비닐이 나오긴 했는데, 성내면서 기분 나빠할 수 있었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여서 그냥 넘어갔다. 요리 하시는 분들도 실수하실 때가 있겠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가까운 바닷가

블라디보스토크 하면 바다, 항구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기 위해 그렇게 많이 노력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이곳을 떠나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갈 때까지 바다를 거의 한 달 넘게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 바닷가가 있다면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주변을 둘러보니 바로 앞에 바닷가가 있었다. 신호등을 건너 그쪽으로 향했다.

몰랐는데, 여기도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소인 모양이더라. 한국 커뮤니티에서는 “해양 공원”으로 알려져 있던데, 현지에서도 실제로 그렇게 불리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아무런 정보 없이 도시를 날 것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이제 곧 해가 질 시간이 다 되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아직까지 이 나라가 어떤지 파악되지 않아서 밤 시간대에는 섣불리 돌아다닐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말이 있지 않았는가. 밤에 어디든지 마음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우리나라 뿐일거라고. 지금 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인 것 같은데… 그래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인상을 준 나라는 하나 아니면 둘? 정도다.

매일매일 있었던 일을 꼬박꼬박 기록하고 자려고 했지만, 몇 줄 쓰다가 너무 피곤해서 그만두고 잠들었다.
오늘은 도착한 날이라서 피곤할거고, 적어도 내일까지는 오늘 일어났던 일도 생생하게 남아 있을 것이니 내일로 미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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