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일차, 2019년 9월 22일

D+28: 모스크바 북한 식당 방문기

오늘의 일정

오늘 밤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야간 열차에 탑승한다. 새벽 2시 조금 넘어서 출발하는 기차인데, 역의 짐 보관소에 무거운 짐을 맡기고 오늘 일정을 시작할까 싶었는데 동선의 꼬이는 불편함, 분실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친구가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아서 그냥 짐을 들고 여기저기 이동하다가 밤 늦게 기차역으로 향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모스크바 마라톤

모스크바에 도착하기 며칠 전에 구글 지도를 통해 모스크바 지리 정보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구불구불하게 보라색 점선으로 이상한 경로가 지도 위에 그려져 있었다. 이런 레이어가 추가되어 표시된 이유는 바로 “모스크바 마라톤”이 열리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이런 행사가 열리면 하프, 10km, 5km 로도 많이 열렸을텐데, 이번 대회는 풀코스 마라톤으로 운영되었다. 충분히 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고 나와보니 도로의 많은 부분이 통제되어 있고, 마라톤 주자들이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마라톤은 시민 모두가 참여하고 있었다. 몸이 불편해 뛰지 못하시는 분도 휠체어와 같은 보조 도구를 이용해 대회에 참가하신 분도 있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는데, 구름이 가득 낀 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였다. 한편으로는 달리는 데 따가운 햇빛이 내리쬐지 않아서 좋지만 반대로 어제만 해도 기온이 8도까지 떨어져 많이 추워진 모스크바라는 걸 감안하면 감기에 걸리기 쉬운 날씨기도 했다. 외국인인 우리가 사진을 찍고 있으니 반갑다는 표현을 해 주시는 분도 계셨고, 우리를 보고는 스스로 파이팅! 하고 다짐하고 가시는 분도 계셨다. 이런 짖굳은 날씨에도 도전을 이어나가는 분들께 응원하는 마음을 가졌(는데 잘 전달되었을 지는 모르겠)다.

우중충한, 회색의 모스크바


어제 저녁에 구경나왔던 모스크바 강가의 삼각형 조망대로 다시 나와봤다. 푹 내려앉은 느낌의 무거운 날씨에 무거운 짐이 더해져 나름 나의 평소 모습을 잘 표현한 사진이 나온 것 같다.

러시아에서만 벌써 3주를 지냈다. “러시아”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회색”이 생각나는 우중충한 분위기다. 모스크바는 휘황찬란해 여타 중소도시처럼 그런 느낌은 전혀 나지 않지만, 이번엔 날씨가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주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추적추적 내리던 가랑비가 잠시 멈추고 햇빛이 들기 시작했다. 촉촉히 젖은 바닥이 햇살에 더욱 빛나는 모습은 이런 날씨에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신선하고 멋진 풍경이다.


어떤 행사장에서는 이렇게 공연도 하고 있었다. 러시아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니 뭘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모스크바 대학 가는 길

모스크바에는 “스탈린 양식”이라 불리는 양식을 한 독특한 건물이 7개 있다고 한다. 러시아 외무성, 어떤 호텔 등이 이런 양식으로 지어졌고 모스크바 대학도 비슷한 양식의 건물을 가지고 있다. 모스크바 대학의 경우에는 앞에 잔잔한 연못까지 있어 멋질 것 같아서 한 번 보러 가고 싶었다.
(이 양식을 한 건물은 러시아 뿐만 아니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도 있고 과거 소련의 일원이었던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 등지에도 있다)



모스크바 역과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이다. 이 역은 특이하게도, 모스크바 강 위의 다리 부분에 설치되어 있는 역이다. 굉장히 신기하고, 역의 옆면이 이렇게 유리로 뻥 뚫려 있어 시원하게 풍경도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지하철 역에서 나가자 마자 태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비바람이 불어친다. 그냥 비 조금에 바람이 많이 부는 것이었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바람이 정말 차가웠다. 거의 얼음 바람 수준이었다. 강가 쪽으로 나가면 바람이 훨씬 더 세게 불었다. 도저히 이 날씨에 밖을 걸어다니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역에서 잠시 기다렸다. 그런데 역 안에서는 휴대폰 신호가 또 잘 잡히지 않아 오프라인에서 할 수 있는 게임을 하거나 간단한 여행 기록을 남겼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보내고 나니,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맑은 날씨가 펼쳐졌다. 도저히 알 수 없는 날씨다. 이 때 쯤 되니, 몇몇 완주하신 분들께서 완주 메달을 들고 이 지하철 역을 통해 귀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스크바에는 산이 없다. 그나마 높은 곳을 찾아 보라면 언덕이다. 모스크바 대학도 언덕을 올라 가야 다다를 수 있다. 그 언덕 비탈면으로는 이렇게 숲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저쪽은 “모스크바 시티”로 불리는 곳이다. 모스크바에서 새로운 고층 빌딩이 세워진다면 대부분 저곳에 세워지는 모양이다. 모스크바는 유럽의 그 어떤 곳보다도 고층 건물이 들어서는 속도가 매서운 곳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것들이 러시아가 소련 붕괴 이후의 성장을 과시하고 싶어 나오는 것이 아니겠나 싶다.

안타깝게도, 모스크바 대학 가는 길은 있지만 “모스크바 대학 방문 이야기”는 없다. 왜냐면 고지를 눈 앞에 두고 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고, 구불구불한 숲길에 흥미가 떨어진 친구가 “꼭 가야 돼?”라는 말을 꺼내서 그냥 이까지만 구경하고 돌아가는 쪽으로 결정했다. 5분만 더 걸어가면 되는데. 아쉬웠다. 아무래도 나도 저 위쪽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모르니 “저 위에 가면 멋진 일이 펼쳐진다”고 호언장담을 할 수도 없었고 돌아오는 길 또한 이럴 것을 생각하니 다음으로 미뤄 두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근처에 북한 식당이 있는데 이곳에 가 보기로 했다. 아주 가까이는 아니고, 지하철으로 서너 정거장 가야 하는 곳에 있다. 모스크바는 매우 큰 도시다. 이정도면 매우 가까운 거리이다.

북한 식당에서 오랜만에 접하는 한식

북한 식당 상호는 “카페 고려”다. 이곳에 가 본 한국인들의 글이 인터넷에 많으니, 가고 싶다면 그것을 검색해 보라.

지하층으로 들어가는 좁은 계단 통로가 있고, 내려가는 길에 “북한스러운” 그림들도 다수 걸려 있다. 북의 시설(!)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상당히 조심조심 들어가느라 사진 같은 것도 전혀 찍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쫄릴(?) 필요는 없는데 조심스러워지는 뭔가가 있다. ㅎㅎ


심지어 식당 안에 와이파이 까지 설치되어 있다. 비밀번호가 david 뭐라뭐라 되어 있는 것 같던데, 왜 그런 이름으로 설정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 이게, 식당이 지하에 있어서 또 모바일 인터넷은 또 안 터지는 터라 찝찝하지만 무료함을 달래려면 와이파이를 연결해서 써야했다. 그리고 좀 궁금하기도 해서 연결했다. ㅋㅋㅋ
뭔가 이 인터넷 쓰는 도중에 검열당할 것 같아서(에이 설마!) 친구에게 메세지 보내면서 김X은 이름도 제대로 안 쓰고 그랬다 ㅋㅋㅋㅋ

이렇게 된 메뉴판이 있고, 식당 내부는 대략 이렇게 생겼다

식당 인테리어는 매체에서 자주 보던 북한식 인테리어를 닮은 듯 했다. 약간 20년 전 철 지난 디자인을 한 듯한?

테이블에 앉아서 짐을 풀고 메뉴판을 구경한 뒤 주문을 하기 위해 종업원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러더니

무엇으로 드시겠습니까?

하고 바로 북한 말로 물어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변 식당을 둘러보니, 한국인이 절대 다수이고, 외국인은 극소수였다. 이런 외모를 한 사람이 이 식당에 온다면, 십중팔구 한국인이니 종업원도 이에 익숙해져 망설임 없이 한국어로 접객을 하는 모양이었다.
평양”랭”면과 돌솥비빔밥을 주문했고, “음료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하는 질문에, 차를 추천해 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우룬차(우리나라에선 우롱차로 통하는 그것)를 추천해주셨다. 와… 차의 부드러움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지금껏 먹어 본 우롱차 중 최고였다. 다음에 차 티백을 살 때는 우롱차를 사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에도 메뉴 이야기를 더 하자면,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메뉴들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인 식당에서 맛보는 한식들은 물론이고 약간 중국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물고기 요리 같은 특별한 요리들도 많이 보였다. 대략 그 비주얼은 이 요리(쏭수꾸이위)와 비슷했다. 어떤 외국인 분들은 단체로 이곳에 방문하셔서 이것저것 시켜 다양하게 맛보시는 것 같았다.

충격적인 북한의 오케스트라

뒤를 돌아보니 TV에서 북한 오케스트라의 공연곡들이 나오고 있었다. 왼쪽 위에는 우리가 흔히 마주하던 “조선 중앙 TV”로고도 박혀 있었다. 아니 그런데,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가 저렇게 군복을 차려 입고 있는 모양이 참으로 신기했다. ㅋㅋㅋㅋㅋㅋㅋ
“북한” 하면 생각나는 그 이미지가 정확히 반영된 모습이었다.

뭔가 사진을 대놓고 찍으면 제지당할까봐 흥미로운 장면들을 조용히 안 들키게 찍느라 고생을 좀 했다. 그래서 사진 품질이 저 모양이다. ㅋㅋㅋ 바로 위 사진을 자세히 보면 내 어깨가 조금 보인다 ㅋㅋㅋ

우리나라에서 ‘평양냉면’을 표방하는 그 어떤 냉면과도 맛이 달랐다.

곧 음식이 이렇게 준비되었다. 냉면을 내놓으며 “식초오 겨자를 넣어 드시면 됩니다” 라고 북한 말로 설명해주셨다. 그렇지만, 나는 넣지 않았다. 음식 그대로의 맛을 중요시 하는 나만의 신조(!?!?) 때문인 것 같다.
뭔가 밋밋한 맛일지도 모르지만, 여러 번 곱씹어 보면 그 안에 내재된 풍부한 맛을 느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음식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데 있어도 비슷한 것 같다. 굳이 자극적이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 하지 않아도 반복적인 삶이 펼쳐지는 중에도 미묘한 차이를 찾으며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조미료가 필요 없는 밋밋한 인생”이다.

나는 국수류의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다. 지금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한 때 냉면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이북식 평양 냉면을 표방하는 그런 전문점에 찾아간 적은 없어서인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 먹던 물냉면과는 전혀 다른 맛의 깔끔하고 부드럽고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그런 육수 맛이었다. 정말 마음에 들었다. 국물까지 깔끔하게 비웠다.
(그 이상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이 무려 10개월이나 지난 시점이다! 그러니 그럴 수 밖에 ㅠㅠ 점점 생생함은 줄고, 소설이 되어가는 나의 글이다)


이건 수육이다. 싸 먹을 수 있도록 데친 배추와 생마늘, 고추를 같이 내어 주었다. 와…. 그간 식재료로 마늘은 여러 번 구해다 먹었지만 맵진 않았는데, 여기는 완전 켁켁 거릴 정도로 매운 마늘을 내어 주었다. 이것이 한국의 매운 맛인가…!

수육 맛은 우리나라와 거의 흡사했다. 그냥 “맛있었다!” 한 마디로 설명 가능한 요리이다.
사진은 없지만 비빔밥도 정말 맛있었다. 한국의 맛과 동일하다! 여러모로 정말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밥값은 결국 북한으로 들어가겠지만, 나쁘지 않은 곳에 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로켓이나 쏘지 말고….

허나, 2019년 말 기준(방문일로부터 3달 후)으로 러시아가 대북 제제 유엔 결의안을 이행하기 위해 북한 해외 노동자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과정에서 이곳 모스크바의 북한 식당도 영업을 중단하게 되었다고 한다뉴스 기사(링크).

그 뒤 오늘 있었던 다른 이야기들


북한 식당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다시 시내로 돌아 가던 길에 엄청난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산도 제대로 펼칠 수 없을 듯 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람에 비가 잦아들 때까지 인근의 지하도에서 비를 피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미 홀딱 젖어버린 뒤였다. 모스크바 시민들도 이런 날씨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다들 지하도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가방이 완전 방수는 아니지만 어느정도의 물기, 습기를 막아줘서 여권, 카메라 등의 중요 물품을 지켜주었다. 친구 가방은 꽤나 많이 젖었던 터라 바로 여권 같은 중요 물품을 꺼내 물기를 털어내고 말렸다. 가방 선택에 있어 고려를 꼭 해봐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또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이렇게 하늘이 맑게 개어 따사로운 햇살이 비쳤다.


붉은 광장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K-pop을 좋아하는 외국인 친구가 안내해서 간 한식당. 역사 박물관 뒤편 지하 쇼핑몰에 있었다. 이곳 지하에 이렇게나 큰 쇼핑몰이 있을지 상상을 못했다. 외국인 관광객이라면 쉽게 놓칠 수 있는 부분이다.

가게 이름은 “Soul Seoul”이었나? 그랬다. 우리를 생각해서 한식당에 데리고 간 것 같은데, 위에서 본 것과 같이 북한 식당에서 오리지널을 영접하고 와서 그닥 인상깊지 못했다.
이건 굉장히 로컬라이징이 많이 된 비빔밥. 들어가는 나물 중에 피클(!)이 있고, 고추장도 초고추장보다 더 새콤하고 덜 자극적인 것이 들어간다. 그렇다고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해외에서 한식을 먹는 목적”을 충족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은 맛이다. 이것 말고 다른 메뉴들도 있었는데, 한국의 것과 완전히 다른 요리라서 자세히 보지 않았다.


그 유명하다던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 걸어가면서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훨씬 더 웅장하고 큰 노보시비르스크의 국립 오페라 발레 극장 건물을 본 터라, 그다지 인상 깊지 않았다.


러시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패스트푸드점에서 먹고 남은 쓰레기를 치우는 것은 직원의 몫이다.
저녁 11시가 넘어서자 쇼핑몰의 가게들도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사람들이 하나 둘 하루를 마무리 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나의 모스크바 이야기도 마무리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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