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일차, 2019년 9월 26일
오늘의 주요 이동 경로
오늘은 처음으로 구 소련권 국가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핀란드 헬싱키로 가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기차를 타는 것이다. 침대 객차가 있고, 고속 열차가 있는데 고속 열차가 더 저렴해서 놀랐다. 아침 6시 40분, 이른 시각에 출발하는 열차를 탄다면 또 그것의 반값에 갈 수 있다. 그토록 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북유럽으로 가는 관문은 이렇게나 관대하다!주머니 사정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 배낭여행자들에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아는 선에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럽으로 나가는 방법은 이것 외에도 버스 등을 이용해 에스토니아 혹은 라트비아 등지로도 떠날 수 있다. 원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저 끝까지 올라갔다 올 계획이라서 이쪽은 전혀 찾아보지 않았는데, 막상 발트해 인접국가에 도착해보니 새로운 이동 방법이 눈에 들어왔다.
D+32: 핀란드로 향하는 고속열차 알레그로(D+32)
결국 밤을 새다
핀란드에 들어가기 전이지만, 벌써부터 핀란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북유럽의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물가가 비싼 편인 북유럽의 핀란드는 숙소비부터 살인적이었다. 그간 구 소련 지역을 여행하면서 에어비엔비를 통해 집을 빌려 쓰는 것이 가장 편해서 이번에도 핀란드에서 빌릴 수 있는 집이 있나 싶어 열심히 검색을 해 봤는데 정상적인 가격대를 가진 집이 거의 없었다. 1박에 기본 10만원은 넘어가는 아찔한 모습을 자랑했다.
대부분의 숙소 검색 앱이 지원하듯이, 에어비엔비에도 숙박 요금으로 필터링 할 수 있는 옵션이 있다. 그걸 이용해 상식적인 가격대를 가진 숙소를 찾아보려 했다.
찾았다, 8만원! 그럼 인당 4만원 아닌가?
숙소가 캠핑카였다. 뭐.. 그래도 이 가격에 잠이라도 잘 수 있다면 언제든 땡큐였다.
근데 함정은 이게 또 시내에서 40km 떨어진 어딘가에 설치되어 있는 캐러밴이었다는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헛웃음만 나왔다.
부킹닷컴도, 호스텔월드도 이곳 저곳 다 뒤져 봐도 부킹이 풀이어서 자리가 없거나 1박 백 만원이 넘는 호텔 같은 곳만 남아 있었다(아니! 그동안 쓴 돈이 백 만원 될까 말까인데!!!). 하…. 당장 내일 무엇을 할 지 정해진 게 없는 노답 인생의 최후가 이런 건가 싶었다.
계속 인터넷 검색을 했다. 먼저 다녀간 사람이 묵은 저렴한 숙소가 있는지. 대부분 “유로 호스텔” 이야기를 많이 꺼내던데 거기도 풀 부킹 상태였다.
그냥 접어두고 내일 핀란드에 도착하면 뭔가 대책이 서겠지 하고 잠들었다. 일 줄 알았는데 얼마 못 가서 다시 깨버렸다. 아무래도 자칫하다 첫 노숙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아니 여기 문명이 있는 곳 아니었어…?) 금방 깼다. 4시에 자서 4시 반에 일어나다니… 그리고 계속 검색만 했다.
그렇게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보니 이제 지하철 첫 차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머지 짐을 꾸리고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둑어둑 새벽 길
숙소에서 나올 때 조금 게으름을 피워서 첫 차를 탄 건 아니고, 두 번째나 세 번째 차를 탔다. 지하철역에 가까워지니 전차들도 하나 둘 다니고, 이른 아침에 길을 서두르는 사람들도 보인다.
아오… 이런 지긋지긋한 짐 검사. 이번에도 어김없이 짐 검사를 한다. 여행 배낭처럼 굉장히 큰 짐은 따로 검색대로 빠져서 여러 검사를 추가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복잡하다. 그래서 만약 지하철과 버스 둘 다 타도 괜찮은 상황이라면 버스를 탄 적도 있다. 이제 러시아를 떠나는 것이니 이것도 지하철 역에서는 마지막 짐 검사인가? 싶었다.
앗! 여기가 아니라고?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막상 검색대를 통과해 짐 검사를 다 받고 나니 검색대 업무를 하시는 분께서 “핀란드에 가세요?“라고 물어보시는 것이다. “네 맞는데요” 하니 “알레그로 기차인가요?” 하고 다시 되물으신다. 그렇다고 하니, 이쪽 입구가 아니라 오른쪽으로 돌아 가면 있는 다른 입구가 있다는 것이다.
국경을 오가는 열차라 일반 열차와 다른 곳에서 출발하나 싶었다. 아하… 길을 서둘러야 한다. 열차 출발까지 약 7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다행히, 멀리 가지 않아도 건물을 나서자 마자 바로 2번 플랫폼이 있어 기차에 탈 수 있었다. 신기한 점은 기차 문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버튼을 누르고 문을 열어 타는 방식이었다. 추운 지역이라서 그러는지, 인건비 절약을 위해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타보는 “좋은 기차”
편의시설
레전드 러시아 출국 심사 ㅋㅋㅋ
보안상의 이유로 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기차가 출발하자 마자 바로 스탬프를 출입국 담당관이 와서 러시아 출국 절차를 진행한다. 우리 칸의 승객들 대부분이 신분증만 보여주는 것으로 해결이 되길래 러시아나 핀란드 사람이라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우리 차례가 되어서도 신분증만 확인하고 빠르게 스탬프를 쾅쾅 찍어 주었다. 아무것도 안 물어보고 ㅋㅋㅋㅋ
인간적으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사이의 국경에 비해서 너무나 관대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러시아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갈 때는 “러시아에 왜! 왔습니까!” 하고 각을 잡고 심문하고, 다시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로 돌아올 때는 “왜 키르기즈?” “뭐하러 갔어?” 하고 꼬치 꼬치 캐묻고 짐 검사까지 확실히 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전반적으로 당국에서 유럽측 국경은 상당히 신뢰하는 반면, 중앙아시아측 국경은 문제의 소지가 많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지금 중앙아시아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러시아에 크게 의존적일 수 밖에 없고, 힘이 약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아, 이와는 별개로 나의 출국에 아주 경미한 문제가 있었는데, 러시아 입국 시 받았던 거류증에 입국 스탬프가 찍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손으로 서류를 수 차례 가리키며 나에게 물었다. 아마 그 “키르기즈 ㅋㅋㅋ” 하고 비웃었던 직원들이 찍어 주는 것을 잊었던 것 같다. 다행히 친구의 서류에는 도장이 찍혀 있었고 다시 이를 여러 번 가리켜 동행인이며, 우리의 실수가 아님을 클레임했다.
그러더니 거류증 서류를 챙겨 들고 출국 절차를 마무리하셨다.
나는 그렇게 러시아 땅을 벗어나지 못했는데도, 이미 러시아를 떠난 것으로 취급이 되었다 ㅋㅋ
중간에 한 두 번 더 정차하지만, 아까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에서도 보았듯, 플랫폼 입구에서부터 꼼꼼하게 관리할 것이므로 문제 없을 것 같았다.
핀란드 감성 미리 느껴보기
핀란드 국민의 시벨리우스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한다. 핀란드 사람들의 정서를 조금이라도 미리 살펴보려고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며 기차 여행을 시작했다.
쉥겐 협정 체결국 입국 심사
러시아 국경 주변에서 한 번, 핀란드 국경 주변에서 한 번 짧게 정차했다. 이를 통해 출입국 관리 직원들이 타고 내린 것으로 보인다. 업무용 태블릿 컴퓨터를 든 직원이 차례로 돌아다니며 처리를 하셨다. 확실히 분주하게 도장을 쾅쾅 찍어 처리하던 러시아 측에 비해 사람 별로 차분하게 진행하는 것 같았다.
여권을 꺼내 들고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금 오래 걸릴 것 같아 초조함 대신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한 시간쯤 기다렸을까. 우리 차례가 되었다. 여권을 먼저 확인하고 스캔했다. 그러더니 영어로 다수의 질문을 하셨다.
- 여기 도착하기 이전에 어느 곳을 방문했는가?
-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를 방문했다
- 유럽에는 어떤 목적으로 방문하는가?
- 관광을 목적으로 방문한다
- 핀란드 이후로는 어디로 갈 것인가?
-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스웨덴이나 에스토니아를 생각하고 있다
- 집으로는 언제 돌아갈 것인가? 돌아가는 티켓은 있나?
- 아직 정해진 것은 없지만 돌아가는 티켓을 살 충분한 돈은 있다. 한 달 내외로 체류할 것 같다.
등의 질문을 차례로 하셨다. 유럽 전역에 대해 똑같이 진행되어야 하는 입국 절차인데다, 첫 입국 과정이다 보니 훨씬 더 깐깐한 질문을 한 것 같다.
멋진 바깥 풍경
기차 타고 가는 길의 뷰가 굉장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와 같이 넓은 평원이 펼쳐지고, 주변으로는 곳곳에 호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식당칸
식당칸은 이런 모습이다. 새 기차라서 그런지 굉장히 세련된 모습이었다. 각 테이블 별로 소금과 후추도 마련되어 있어서 적당히 뿌려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잘 볼 수 없는 암염이 있었다. 빙빙 돌아가는 뚜껑에 붙어 있는 그라인더로 갈아서 조금씩 사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통후추도 같은 방법으로 갈아 이용한다.
소금 광산에서 암염을 채굴하기도 쉽고 발트해의 염도가 낮아 바다로부터 소금을 얻기 쉽지 않았던 모양인지 암염 형태로 된 소금이 굉장히 많이 보였다.
만 원 정도의 꽤나 비싼 가격이지만, “기차니까… 핀란드니까…” 하는 생각으로 충분히 이해되었다.
헬싱키에 도착하다
이제 늘 써오던 러시아 루블이 아닌 유로화가 필요하다! 북유럽의 물가가 굉장히 높은 편이긴 하지만, 여전히 독자 화폐를 사용하는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와 달리 핀란드는 유로화를 사용하고 있어 어느 정도 물가 방어가 되는 편이라고 한다.
아무튼, 역에 있는 ATM을 찾아 유로화를 인출했다. ATM 수수료 정책이 어떻게 될 지 잘 모르니 우선 40유로만을 출금했다.
그런데 ATM에서 돈을 뽑고 나니 앞에서 어떤 청년 두 분이 1유로짜리 동전을 손바닥에 올려 든 채 밥을 먹지 못해 배고프다고 구걸했다. 드릴 돈이 없다고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치니 뒤에서 지나가는 우리를 보고 대충 나쁜 말을 하시는 듯 했다.
그렇지만, 별 탈 없이 어느 정도의 돈을 가지고 역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숙소는 구하지 못했는데, 문제가 잘 해결될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