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일차, 2019년 8월 29일 ~ 9월 1일


“주의! 건성으로 작성한 포스트입니다”

다음 포스트는 바쁜 “척” 하는 작성자의 시간 부족이라는 “핑계”로 인해 많은 이야기를 덜어낸 포스트입니다.
못 한 이야기는 시간 순서 구분 없이 맨 마지막 문단에 몰아서 간단히 언급을 해 두었습니다.
특별히 궁금한 이야기가 더 있으실 때 알려주신다면 시간 나는 대로, 업데이트를 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글이 내용이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126일간의 여행에서 얻은 풍성한 기억이 사그라들기 전에 많은 글을 작성해둬야 하는 터라 ㅠㅠㅠ

이번 게시물에서의 주요 이동 경로

시베리아횡단철도의 블라디보스토크-이르쿠츠크 구간을 이용하였음. 약 4,100km


D+4 : 우여곡절 끝에 오른 시베리아횡단열차

레샤 아저씨네 가족과의 대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우리 객실에 다른 승객이 없었다. 여권 언제 오나 목 빠지게 기다렸고, 그 사이에 태국 아저씨께서 잠시 오셔서 놀다 갔다. 그러던 중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까운(두 시간 거리, 멀고 가까움의 스케일이 다름에 유의하자) 우수리스크에 정차했고, 몇몇 승객이 더 탑승했다. 비어 있던 우리 객실에도 새로운 승객이 들어왔다. 서너살 되어 보이는 꼬마 아이가 하나 있는 가족이 나머지 두 침대를 채웠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2등석 객실의 모습. 인터넷에 다른 사진도 많을테니 찾아보시라..

우수리스크에서 승객들을 모두 태운 후, 열차는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곧 해가 지자(7시 경) 사람들은 이불을 펴고 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우리 방을 제외한 거의 모든 객실의 불이 꺼졌다. 기차 안에서 해가 지고 나서 할 수 있는 것들 가장 만만한게 수면이다. 마치 전기가 보급 되어 밤이 밝혀지기 전의 사회가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이 나라 사람들은 열차에서 일찍 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객실에서는 불이 조금 더 오래 켜져 있었다. 우리도 첫 번째 동승객을 마주한다는 사실이 새로웠고, 새로 탑승하신 승객 분들도 외국인 승객이 신기한 모양이셨는지 바로 잠들지 않으셨다.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다.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러시아어로 할 수 있으니 먼저 인사드렸는데, 대답으로 아주 기~인 러시아어 답변이 돌아왔다. ㅋㅋㅋㅋㅋㅋ 러시아어를 할 줄 아신다고 생각을 하셨던걸까!

안타깝게도, 러시아어를 할 수 없어 영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표정을 보니 영어를 거의 하나도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더라. 아아, 조금 어렵지만 번역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우리는 구글 번역기, 아저씨네 가족은 얀덱스(러시아의 소프트웨어 기업이다) 번역기를 사용해 조금의 대화를 나누었다. 몇 살이고,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떤 이유에서 여행을 하고 있는지 등을 물어보셨다.

아저씨네 가족은 우수리스크에서 휴가를 보내고 다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어린 꼬마 아이는 많이 피곤했는지 액체괴물을 조물조물 가지고 놀다가 곧 잠들었다.

far away
넓고 넓은 러시아.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지나는 주요 도시와 그 사이 거리를 알려 주신다. 그리고 그 먼 정도를 나타내는 러시아어 단어도 알려주셨다. 이 때 처음으로 키릴 문자의 활자체와 필기체가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창 크고 있는 자녀를 두신 분이라 그런지, 한국의 교육 환경과 이후의 진로가 어떤지 관심이 많으셨다. 이 질문을 해석하고 답하는 데는 대화의 유형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따라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크게 두 가지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는 “나”라는 사람과 아저씨네 가족 사이의 대화라는 생각 아래 내가 처한 현실의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인”과 아저씨네 가족 사이의 대화라는 생각 아래 나의 이야기 뿐만 아닌 다양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 가며 한국 사회의 여러 면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대개 후자를 택하지만, 어쩌다 대화가 너무 전자로 치우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의 장벽, 시간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이 말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전달했으니 만족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마지막으로, 아저씨는 러시아 사람들 중에서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러시아어를 간단히 배워 두면 더욱 풍성한 여행이 될 것이라고 귀띔해 주셨다(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더욱 절실하다는 의미다!).

휴가 다녀와서 피곤하셨을텐데, 너무 늦은 시간까지 붙잡고 이야기를 이어나간게 아닌가 싶어 조금은 미안해졌다(다른 객실은 불 꺼진지가 벌써 세 시간 째다). 또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내릴 준비를 하셔야 할 텐데…

D+5 : 시베리아횡단열차 안에서 맞는 첫 아침

2019년 8월 30일 금요일

하바롭스크의 아침, 기차역의 분위기를 느끼다

어쩌다가 잠든지 두 시간 정도만에 잠시 깼다. 그런데, 깬 이후에 배가 고프고 갈증이 느껴져서 오랫동안 다시 잠들지 못했다. 기차 침대에 누워서 눈은 감고 있는데 거의 20분마다 시계를 한 번씩 본 기억이 있다. 그렇게 새벽 네 시 까지 제대로 잠에 들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다섯시 쯤 잠시 몸을 뒤척이다 7시가 거의 다 되었을 때 쯤 완전히 일어났다. 반대편 침대에 탔던 가족이 이제 집이 있는 하바롭스크로 내릴 때가 되어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만나서 반가웠고, 서로 많은 것을 배웠다는 인사를 나누었다.

나중에 한국에 도착한 다음에 여행 이야기를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메일 주소를 알려주셨다.
이 웹페이지에 게시글이 어느 정도 올라온다면, 여기 링크를 보내드려 볼까 싶다. 한국어로 되어 있지만, 번역기 도움을 받으면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알아보실 수 있을 거다.

하바롭스크의 차가운 아침 공기, 레샤 아저씨의 진심어린 조언 이야기가 담긴 전광판

장거리 기차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름 난 큰 도시에는 30분 ~ 60분 정도 정차해 승객은 바람을 쐬고 열차는 간이 정비를 하고 물을 보충한다. 휴식을 취할 겸, 레샤 아저씨네 가족을 따라 하바롭스크 역에 잠시 내렸다. 아저씨는 여권을 포함한 중요한 물건은 꼭 챙겨서 다니고, 나가시면서 4번 플랫폼 간판을 가리키며 꼭 기억하고 여기로 돌아와서 탈 것을 다시 한 번 당부해 주셨다. 아직 러시아 기차에 대해 잘 모르는 외국인을 위해 이렇게나 신경을 많이 써주셔서 감사했다.
(여담이지만, 이 역에도 플랫폼 번호에는 짝수가 있다 하더라도, 기차 레인에는 또 홀수 뿐이었다. 아무튼!)

하바롭스크의 아침 공기는 꽤 쌀쌀했다. 이제 정말 시베리아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 하바롭스크 역에 있던 매점에서 감자칩 하나를 사왔다. 3천원 정도 했는데, 러시아 물가는 물론 우리나라 물가에 비해서도 조금 비싸긴 했다. 그래, 여기는 역이니까..
사워크림 맛 감자칩인줄 알았는데, 포장지를 자세히 보고 맛을 보니 “고수” 맛인 것 같더라. 중국, 동남아에서 주로 먹는 향신료로만 생각했는데, 이 지역 사람들도 조금 즐기나보나 싶었다.

여유 시간이 있었지만 역 안팎을 잠시 둘러보지는 않은 채로 다시 4번 플랫폼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기차 타고 가는 도중에 오랫동안 하차해 본 경험이 없어, 나중에 어떤 일이 생겨 기차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처음에는 항상 조심할 필요가 있다. 아, 물론 끝까지 조심해야한다.

플랫폼에 다시 도착하니 수많은 흡연자들이 오랫동안 참았던 담배를 피우느라 공기가 매우 매캐했다. 기차 안에서는 음주 및 흡연 등의 행위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몰래 피고(?), 마시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듯 했다. ㅋㅋㅋ

처음에 기차에서 내렸다 다시 탈 때 티켓이 없는데(각 호차 차장님이 보관하고 계신다) 어떻게 탈 수 있는지 좀 궁금했는데, 차장님이 맡은 칸의 승객들은 기억하시고 문제 없이 탑승하실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승무원은 2교대로 활동하시는데, 매 교대 때마다 객실 및 복도를 청소하느라 객차 전체를 많이 돌아다니시기 때문에 승무원실을 찾아가지 않아도 자주 보고 얼굴 도장을 찍어둘 수 있다(?).

새로운 마음, 새로운 이야기를 담고 다시 출발하는 열차

그렇게 돌아왔고, 곧 기차가 출발했다. 레샤 아저시네 가족이 떠난 빈 자리에는 다시 채워지지 않았다. 다른 승객 없이 편안하게 휴식을 즐겼다. 아직 아침이다. 아침 7시. 늦잠을 자며 게으름을 더 피우기에 충분히 이른 시각이었다. 그렇다고 더 잠을 자진 않았고, 컵라면을 꺼내 아침으로 먹었다.


하바롭스크 역을 출발하자마자 굉장히 큰 강을 지나게 되는데, 이 강이 바로 중국에서 “헤이룽장(黑龙江, 흑룡강)”, 러시아에서 “아무르강”이라 부르는 강이다. 두 이름에는 각각 물 색이 검고, 강이 크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정말 말 그대로다. 정말 넓은 강에 검은 물이 흐른다. 물이 검은 이유는 이 지역의 부엽토 때문이라고. 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 사이의 경계를 이루다 연해주를 가로질러 사할린 쪽으로 빠져나간다. 바다에 이르기까지 한참 남았는데도 폭이 정말 넓다.

더욱 낮아지는 동승객 사이의 장벽

기억을 더듬어 보자. 우리나라에서 가족이나 친구 등 지인과 기차를 타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이어간 적이 많은가? 좀처럼 경험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 일본이나 중국을 봐도 그런 모습을 찾기 어렵다. 다른 사람을 피해를 주지 말아야 겠다는 의식,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한 경계심 등이 작용한 결과물 같다.

그러나, 러시아 기차 안의 분위기는 조금 다르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가져온 음식을 나눠 먹는다. 이런 사회의 특징은 이 나라 사람들의 정서 때문일 수도 있고, 아주 오래 달리는 기차 때문일 수 있다. 어느 한 쪽으로 설명하기보다, 위의 두 개를 포함한 다양한 요인들의 상호작용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래서 두루두루 많이 아는 것이 하나를 더 깊이 볼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낸다고 믿는다.

각설하고, 러시아 사람들은 기차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서로 대화를 하거나 십자말 풀이를 하고 틈만 나면 잔다(이상해 보이지만, 개인적으로 킬링타임으로는 이게 최고였다 ㅋㅋㅋ) 물론, 이 사람들도 만나자 마자 10년지기 친구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같이 지내다 보면, 동승객 사이의 장벽이 조금씩 낮아지며 더 많은 교류가 일어난다.

비록, 동북아의 이국적인 관광지 블라디보스토크와 대자연 바이칼호를 볼 수 있는 이르쿠츠크 사이에는 러시아인 만큼이나 외국인 관광객이 많지만, 원래 있던 그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외국인에게도 퍼졌다. 대부분의 외국인 여행객도 그것을 기대하고 있어 받아 들일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 객차에서 장벽을 낮추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누구에게 물어봐도 기차 탈 때 처음 마주했던 태국 아저씨일 것이다. 붙임성이 좋은 이 아저씨는 객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승객들이랑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다른 객실에는 어떤 승객이 있고 이런이런 사람인데 이런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같은 이야기를 다시 전달해주셨다.
그 중에서도, 유독 우리 객실에 더 오래 계셨다. 뭔가 통하는게 있었나보다. 그런데 문제는 아저씨의 영어가 우리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더 심하게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 빈자리는 바디랭귀지가 채웠다. 아저씨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소설 쓰는 듯 한 초월번역이 필요해졌다. ㅋㅋㅋ 그런데 뭐 그럼 어때. 그만큼 부담없이,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친구가 된 것이다.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여러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고급 어휘와 유창함으로 무장한 영어보다도 상대방의 이야기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귀 기울여 들어주는 태도가 소통에 기여하는 바가 더 크다는 생각을 했다.

겉으로 보이는 언어의 구조는 철저히 붕괴되었더라도, 같은 시간 나눈 대화라도 우리 사이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오가게 되었다. 공감대 형성이다.
오늘도 어김 없이 아저씨의 세계 여행 이야기를 들었다.
시베리아 이후의 러시아 방문 계획이 없는 상태라는 말을 들으시곤, 시베리아 서쪽의 러시아를 다녀온 이야기도 해주셨다. 카잔은 젊음이 느껴지는 현대적인 도시, 예카테린부르크는 역사가 있는 도시라며 추천해 주셨다. 아, 여담이지만 우리나라는 카잔과 깊은 인연이 있다. 왜(링크)?

창 밖의 시베리아 풍경

여름의 시베리아는 초원, 수풀, 늪지, 개울의 반복이다. 눈으로 뒤덮인 것과 또 다른 황량함이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어느 곳에 가더라도 주변을 돌아보면 항상 사람의 손길이 닿은 풍경이 펼쳐진다. 아무리 황량한 벌판을 지나는 듯 해도 그곳은 논밭이다. 산 속으로 들어가도? 그래도 사람의 흔적이 보인다. 그렇듯 땅이 좁고 인구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 자연을 바라볼 수 있을거라 기대했고, 실제로 그런 풍경이 펼쳐졌다.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철도와, 일부 전력 공급을 위한 시설을 제외하면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의 흔적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아무 것도 아닌 사실조차 나를 들뜨게 했다. 모든 것이 새롭다.

시베리아라고 해서 사시사철 추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여름철에는 눈 녹은 물이 흘러 개울이 되고, 고여서 늪이 되고, 그 물이 나지막한 나무와 수풀을 자라게 해 푸른 빛의 시베리아로 바뀐다. 그렇다고 겨울철의 그 혹독함이 사라진 것이라 보긴 어렵다. 여전히 시베리아 땅은 푹푹 빠지는 진흙탕이 되어 사람이 다가서기 어렵게 한다.

“투 데이, 투 나잇”의 지혜

창 밖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낮잠도 좀 자고 일어났다. 그러다 또 점심으로 라면을 하나 꺼내서 먹었다. 지난 날들 있었던 이야기도 기록했다. 대충 마무리하고, 이번에는 태국 아저씨네 객실로 놀러가봤다. 어김없이, 아저씨 아이팟에 들어있는 세계 곳곳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기차 안에서의 시간은 길었는지 아저씨의 길고 긴 여행 이야기도 반복되기 시작했다!

근데 대화 중간 중간에 내가 무의식적으로 손목시계를 자주 봤나보다. 그런 모습을 보셨는지, 아저씨가 “아주 긴 시간이야! 두 번의 낮이 있고 두 번의 밤이 있을거야! 그냥 그걸 즐겨!”라고 하셨다.

고등학교 때 부터 나와 함께 지내온 친구들은 내가 시간을 계획적으로 꼼꼼히 쓰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100미터 3박4일”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을 정도로 느긋한(속 터지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얼마만에 내 본성대로 속 터질 정도로 느긋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시면서 태국에서 가져오셨다는 간식을 나눠주셨다. 손가락만한 소라모양 패스츄리의 속에 소가 채워진 과자였는데, 아저씨 말론 양념된 치킨으로 채워져 있다고 한다. 근데 어쩌면 초월번역이 고장나서(!) 잘못 전달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여기서는 시간을 다르게 세야 한다. 초, 분을 생각하며 살았던 바쁜 한국 사회가 아닌 것이다. 초, 분은 물론 시간까지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투 데이, 투 나잇. 조금은 멀리 서서, 여유를 가지고 바라봐야 하는 것들이 있을텐데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아저씨로부터 수 십 년간 세계를 돌아다니며 깨달은 지혜를 선물받았다.

그리고, 시간을 보는 관점을 달리 하는 것은 러시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다. 넓은 영토와 그에 따른 오랜 이동 시간이 만들어내는 한결 여유있는 차분함. 이 차분함에서 나오는 큰 호흡은 바로 앞의 작은 일에 얽매이기보다 한 발짝 물러서야 볼 수 있는 중요한 일을 발견할 수 있게 하고, 어쩌면 이것이 러시아가 가진 저력이겠구나 싶었다.

오늘을 마무리 하다


다시 둘째날 하루를 마무리 할 때가 되었다. 이제는 러시안 타임에 적응했다. 해가 지고 나서 저녁 먹을거리를 좀 먹어두고 바로 양치하고 불을 끈 후 잘 준비를 마쳤다.

D+6 : 길을 잃은 기차?

이게 시베리아다!

오늘은 밖이 서서히 밝아올 때 쯤 일어났다. 그런데 너무 추운거다. 알고 보니 푹 쉬고 일어난게 아니라 추워서 깨버린 거다. 담요를 덮으려고 선반 위를 살폈는데 어디 가고 없다. 뭐지…? 싶어서 주변을 더 둘러보니 어제 저녁 늦게 올라타신 세르게이 아저씨가 실수로 담요 두 개를 가져가 덮고 계신 듯 했다. ㅠㅠㅠ

‘그래! 이 정도 추위는 이겨내야지!’ 싶었는데, 편안하게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ㅋㅋㅋ
그래서 챙겨 온 침낭을 꺼내 이불 같이 덮고 있었다.

sleeping_bag

침낭을 주섬주섬 꺼내고 그 속에 폭 들어가 있으니 옆 침대에 있던 이르쿠츠크에 사시는 할아버지께서 추위에 떨고 있던 나를 보고 러시아어로 한 마디 하셨는데, 다 모르겠고 “Кореи…$@#(한국…$@#)”, “Сибири(시베리아)” 두 단어만 들렸다. 마치 “이게 시베리아다 한국 녀석들아! 낄낄” 하는 것 같았다 ㅋㅋㅋㅋ 그 와중에 할아버지는 짧은 옷에 얇은 이불만 덮고 잘 주무셨다.

기차가 길을 잃었다고? 한 시간마다 선로에 멈추는 기차

그것과는 별개로 역도 아니고, 우선순위에 따라 후행 열차를 먼저 보내기 위한 대피선도 아니였는데, 선로 한복판에 30분간 의미 없이 정차해있다가 30분 가다 또 서다를 반복했다. 열차 시간표 대비 3~4 시간이 지연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상상을 할 수 없는 지연이 반복되고 있었고, 가다 서다 반복하는 기차가 야속하기도 했다(하필이면 인터넷이 안 되는 곳에 멈추다니… ㅠㅠ).

delay

칼리닌그라드 출신 아주머니께 여쭤봤는데 차장님께 러시아어로 여쭤보시곤 다시 영어로 기차가 길을 잃었다고 해주셨다. 어떻게 기차가 길을 잃지? 잘못된 선로로 들어서서 우회하나? 이렇게 황당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건가? 싶었다. 영어로 바꿔 말씀하실 때 표현을 잘못 하신건가? 싶긴 했다.

계속 반복되는 창 밖의 풍경

하루라는 시간동안 1,000km를 더 달려 왔는데도 풍광, 식생에는 큰 변화가 없다

사실 시베리아에 오면, 키 큰 침엽수들이 빽빽한 냉대림이 계속 펼쳐질 것이라 기대했다(뽀로로가 살 법한 그런 세계 말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수풀, 개울, 슾지, 초원으로 가득한 온대 기후 지역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름철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시베리아 횡단철도 본선은 최대한 남쪽을 지나도록 설계되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룻동안 열심히 달려 1,000km 를 넘게 왔는데도, 주변 풍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러시아 사람들이 사는 방식대로

sunset
길었던 오늘 하루도 저물어 간다. 기차 창 밖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이 보인다. 많은 현지인 승객들이 복도로 나와서 창문을 열고(시베리아횡단철도 객차는 창문 위쪽이 조금 열린다!) 바람을 쐬며 넓은 초원 뒤로 해가 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계셨다. 나도 그 옆에 서서 창문을 열고, 해가 지려 하는 서쪽의 붉은 하늘을 30분 넘게 빤히 바라봤다. 해가 질 때 까지.

이 세계의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을 한 번 따라해 보는 것이다. 수많은 자극적인 콘텐츠가 가득하고, 각광받는 사회 속의 사람들은 지루함을 느낄 수 있겠지만, 밋밋해 보이는 자연 속의 미묘한 매력을 찾아내는 것도 새로운 재미가 될 수 있다. 나는 대체로 많은 이들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행동 양식과 조언을 신뢰하는 편이다(삐딱하게 다시 말하면, 많이들 그러는 “꼰대”에 대한 반감과 저항 의사가 크게 없다). 이 행동 양식에도 수 십 년간 쌓인 지혜가 있다.

D+7 : 오랜 시간 달려 도착하는 날

하나 둘씩 떠나는 동승객들

시베리아 횡단철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 이르쿠츠크 구간을 이용하는 승객 중 외국인의 비율은 상당하다. 보통 외국인 관광객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타고 하바롭스크, 울란-우데, 슬류댠카(환바이칼 관광 열차를 탑승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르쿠츠크 역에서 하차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바롭스크까지는 약 9~12시간 거리에 있지만, 나머지 세 역에는 마지막 날인 오늘 정차한다. 러시아 사람 대비 언어 문제도 적고, 오랜 시간 함께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터라, 아쉬움이 조금 더 크게 다가왔다.

오전에 정차한 울란-우데 역에서는 가장 친하게 지냈던 태국 아저씨와 칼리닌그라드 출신 아주머니께서 떠나셨다. 지금까지 아저씨 성함을 모르고 지냈는데, 이제서야 이름을 말씀하신다. “타쿤”이라 하신다. 우리가 아저씨의 좋은 기억의 일부가 되었는지 아저씨의 여행 사진이 가득 담긴 아이팟에 하나의 사진으로 함께하게 되었다.

점심 때 쯤 정차한 슬류단카 역에서는 대만에서 오신 단체 관광객 분들이 떠나셨다. 환바이칼 관광 열차가 지난다는 포인트를 제외하면 산골에 있는 별 것 없는 작은 역이라 승객이 내리자마자 바로 출발했다.

길게는 3박 4일간 함께 했던 동승객들이 조금씩 떠난다.
이제는, 꽤 길게 느껴졌던 3박 4일간의 기차 여행의 막바지에 들어서는 것일테다.

마치 바다 같은, 바이칼 호수와의 첫 만남

기차 안에서 처음 마주한 바이칼 호. 달리는 열차에서 세 시간 넘게 바이칼 호수가 보인다.

어제는 기차가 한 시간 꼴로 가다 서다를 반복했지만, 다행히도 오늘은 멈춤 없이 달려나간다. 그러던 중, 기차 창밖으로 아주 넓은 물 웅덩이가 보였다. 그러더니 반대편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바이칼!”이라고 알려주신다.

사진은 타이밍이라고, 이 놀라운 순간을 혹시 놓칠까 싶어 호수를 잘 찍기 위해서 휴대폰 카메라를 오래 들고 있었다. 이상하게 계속 수풀에 가려서 온전한 호수 모습을 담을 수 없었다.

그런데 걱정 마시라. 처음 보일 때 보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서 바이칼을 원없이 볼 수 있다. 앞으로 세 시간 동안!

종착지에 다다르고 있다!

저 멀리 공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보인다. 공업지대다. 근처에 큰 도시가 있다. 그 도시는 이르쿠츠크 혹은 그 위성 도시일 것이다. 얼마 안 가 도착할 것이다.

기차에서의 많은 만남을 기억한다는 것

첫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 만났던 사람들

시간적 여유가 없어, 만난 사람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적지 못했다. 그래서 간단한 요약으로 대신한다.
시간 날 때마다 제대로 된 위치에 끼워 넣어, 글을 완성할 것이다.

태국 아재(거의 할아버지) 타쿤

  • 기차 탈 때 같은 칸 문 앞에서처음 만나 3일정도 함께 했고, 가장 많이 친해진 동승객이다. 수십년째 세계를 돌아다니고 계신단다. 여행 이야기를 들어도 들어도 끝이 없을 지경이었으나, 기차에서 머무는 시간은 길었고 거의 다 떨어졌다 ㅋㅋㅋㅋㅋㅋ
    짧은 인생 조언이 꽤 들을만하다. 여권을 못 받았을 때 별 문제 없을거라고 확신하셨는데, 알고보니 영국에서 3000불도 털려 보신 분이더라….ㄷㄷㄷ

하바롭스크의 레샤 아저씨네 가족

  • 우리 칸의 첫 번째 동승객이었다. 여름 휴가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해가 지자, 다른 칸은 모두 자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가족들과 3시간이나 더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아저씨네 가족들이 우리에게 궁금한 걸 많이 물어보았다. 어린 아이는 액체괴물을 가지고 놀다가 잠들었다 ㅋㅋㅋ

블라고르스크의 마샤

  • 복도를 뛰어가며 외국인(우리)가 보이자 “Hello!”하며 반갑게 인사해주던 어린 애다. 알룐카 카라멜도 우리에게 나눠줬다. 그러고는 본인은 заяц(토끼…?)랬다 ㅋㅋㅋㅋㅋ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지도에서 중국 어딘가를 가리키며 뻥을 치고 도망(?)갔다! 답은 블라고르스크 역에 내리는 걸 보고 알 수 있었지! ㅋㅋㅋ

나가노에 사는 일본인 여행객 두 명

  • 묻지 않아도 서로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았을거다. ㅋㅋㅋ 이르쿠츠크로 간다고 한다. 기후, 아이치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니 나가노가 바로 옆에 있다며 반가워했다! ㅋㅋㅋㅋ
    서로에게 방해를 주려고 하지 않는 정서가 만연한 동북아 2개국 사람 사이라 그랬는지 대화가 참 늦게 성사되었다.

이르쿠츠크에 사시는 할아버지

  • 블라고르스크부터 함께했다. 갈색 음료가 무엇이니 물으니 크바스라고 하시며 맛보게 해 주셨다. 저녁이 되자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카드게임을 하셨다 ㅋㅋ
    아침에 추위에 떨고 있던 우리를 보고 러시아어로 한 마디 하셨는데, 다 모르겠고 “Кореи…$@#(한국…$@#)”, “Сибири(시베리아)” 두 단어만 들렸는데 “이게 시베리아다 한국 녀석들아! 낄낄” 하는 것 같았다 ㅋㅋㅋㅋ 그 와중에 할아버지는 짧은 옷에 얇은 이불만 덮고 잘 주무셨다. 현지인은 정말 남다르다!
    크게 말씀이 없으시고 조용한 편이셨지만, 창 밖의 바이칼을 좀 보라며 친절하게 알려주시기도 했다.

치타의 세르게이 아저씨

  • 우리 객실의 세 번째 동승객이었다. 저녁에 기차에 타시곤 바로 주무셔서 아침 식사 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침을 먹으면서 고기가 안에 들어 있는 빵을 나눠주셨다. 튀기지 않은 고로케 느낌이 난다.
    오후에는 간단하게 러시아어 단어를 조금 배웠다.

칼리닌그라드 출신의 아주머니

  • 어제부터 태국 아저씨가 “옆 방에 어떤 승객이 어쩌구 저쩌구~ “ 하시면서 한 번 만나보라고 소개해주셨다. 근데 애써서 그 객실로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아 마주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아주머니께도 우리의 존재를 귀띔해주셨는지 오늘 아침에 물끌이개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아침 인사를 하면서 말문을 트게 되었다. 영어로 꽤 훌륭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러시아인이셨다! 게다가 말로만 듣던 칼리닌그라드 출신이라니! ㄷㄷㄷ
    노잼의 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할만한 일들을 추천해주셨다. 박물관, 미술관, 특히 극장 공연 티켓 가격이 매력적이라 하셨다. 찾아보니, 제일 좋은 자리가 5만원대였다 ㅋㅋㅋㅋ 근데 우리가 가는 날에는 아무 것도 없다.

대만의 장사림 할아버지

  • 우리 객실의 네 번째 동승객. 대만에서 단체 관광으로 오셨는데, 반나절 정도 함께했다. 정말 끔찍한 중국어로 대화를 시도했는데 행선지만 대략 이야기하다가 “팅부동”으로 끝났다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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